데니스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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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니스 윌슨은 1961년 비치 보이스의 드러머로 데뷔하여 가수로 활동했으며, 1965년 영화 배우로도 데뷔했다. 1970년 솔로 가수로 데뷔하여 음반을 발표했으나, 1983년 알코올 중독으로 3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비치 보이스 내에서 작곡, 연주 활동을 펼쳤으며, 찰스 맨슨과의 연관성을 가지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배우로 활동하며,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나, 1980년대 밴드 내 갈등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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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윌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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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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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데니스 칼 윌슨 |
별칭 | 해당사항 없음 |
출생일 | 1944년 12월 4일 |
출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
사망일 | 1983년 12월 28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리나 델 레이 해상 |
악기 | 보컬 드럼 키보드 |
장르 | 록 팝 |
직업 | 음악가 작곡가 음반 프로듀서 |
활동 기간 | 1961년–1983년 |
과거 멤버 | 더 비치 보이스 더 포 스피즈 |
배우자 | 결혼: 캐럴 E. 언롯 (1965년 7월 29일), 이혼: 1968년 1월 14일 결혼: 바버라 샤렌 (1970년 8월 4일), 이혼: 1974년 8월 6일 결혼: 카렌 램 (1976년 5월 21일), 이혼: 1977년 9월 19일 결혼: (1978년 7월 28일), 이혼: 1980년 5월 23일 결혼: 숀 마리 러브 (1983년 7월 28일) |
웹사이트 | 해당사항 없음 |
2. 생애
데니스 윌슨은 1961년 록 음악 밴드 비치 보이스의 드러머로 데뷔했다. 1965년에는 영화 배우로, 1970년에는 솔로 가수로도 데뷔했다. 1971년에는 영화 《Two-Lane Blacktop》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윌슨가의 어머니 오드리는 브라이언에게 비치 보이스 초창기 멤버로 데니스를 포함시키도록 했다. 데니스는 1960년 호손 고등학교에서 드럼 레슨을 받았는데, 선생님 프레드 모건은 데니스가 "배우고 싶을 때는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고 말했다. 브라이언은 "데니스의 바람으로 그룹이 만들어졌다"고 회상했고, 데니스는 첫 리허설에서 "드럼이 더 흥미로워 보였다"며 드럼을 선택했다고 한다.
비치 보이스는 1961년 말 공식 결성되었고, 머리 윌슨이 매니저를 맡았다. 데뷔 음반 "서핀"은 브라이언이 데니스의 권유로 쓴 곡으로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데니스는 "정말 멋있었다. 라디오에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회상했다. 비치 보이스는 캘리포니아 서핑 문화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데니스는 밴드에서 유일하게 실제 서퍼였다.
1963년 초, 데니스는 브라이언의 협력자 게리 어셔와 함께 '포 스피드'라는 팀을 결성해 싱글 "RPM"을 발매했다. 1964년 3월, 데니스는 집을 나와 할리우드로 이사했다. 그해 12월, 머리는 데니스가 94000USD를 썼다며 "얼마나 낭비했는지 알고 울었다"고 말했다.
1965년 1월, 브라이언은 더 이상 그룹과 함께 투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데니스는 이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재떨이를 집어 던지며 격분했다고 한다. 데니스의 친구 에드 로치는 브라이언이 데니스가 받는 숭배에 질투심을 느껴 무대에서 멀어졌다고 말했다. 데니스는 "브라이언 윌슨이 비치 보이스다. 우리는 그의 메시지 전달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1960년대 후반, 데니스는 비치 보이스를 위해 곡을 쓰기 시작했다. 1968년 4월, "Friends" 싱글 B면에 "Little Bird"가 실렸다. 1969년 2월 발매된 ''20/20''에는 데니스가 프로듀싱한 "Be with Me"와 "All I Want to Do"가 수록되었다. 1969년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데니스는 찰스 맨슨의 후견인이었다. 『20/20』에 수록된 "네버 런 낫 투 러브"는 맨슨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맨슨은 데니스에게 보복을 시사했다. 이 에피소드는 데니스의 남은 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70년, 데니스는 솔로 가수로 데뷔했고, 영화 ''투-레인 블랙탑''에서 정비공 역을 맡았다. 1971년 7월 7일 뉴욕에서 영화가 개봉되었고, 이후 "컬트 클래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데니스는 1970년 8월 발매된 ''Sunflower''에 "Forever" 등 4곡을 기여했다. 1970년대 초, 데니스는 Daryl Dragon과 함께 솔로 앨범 ''Freckles''를 녹음했다. 1970년 12월 4일, 유럽과 영국에서만 싱글 "Sound of Free"가 발매되었다. 1971년 비치 보이스 콘서트에서 데니스는 "Barbara"와 "I've Got a Friend"를 피아노 솔로로 연주했다.
1971년 6월, 데니스는 손을 다쳐 드럼을 칠 수 없게 되었고, 1972년부터 1974년까지 Ricky Fataar가 드러머를 맡았다. 데니스는 ''Carl and the Passions – "So Tough"''(1972)에 "Make it Good"과 "Cuddle Up"을, ''Holland''(1973)에 "Steamboat"와 "Only with You"를 기여했다.
1977년, 데니스는 솔로 앨범 ''퍼시픽 오션 블루''를 발매했다. 앨범은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96위에 올랐고, 이후 두 비치 보이스 앨범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1978년에는 후속작 ''밤부'' 제작이 시작되었으나, 여러 문제로 중단되었다.
데니스는 알코올, 코카인, 헤로인을 남용했고, 말년에는 목소리를 잃고 드럼 연주법을 잊어 비치 보이스 공연에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3년 12월 28일, 데니스는 마리나 델 레이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익사했다. 1984년 1월 4일, 그의 시신은 미국 해안 경비대에 의해 수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
데니스 칼 윌슨은 1944년 12월 4일, 오드리 네바와 머리 게이지 윌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 브라이언과 칼,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캘리포니아 호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데니스는 가족 내에서 문제아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이웃 친구 데이비드 마크스에 따르면, 데니스의 "시끄러운 행동"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그에게 "말썽꾸러기 데니스"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윌슨 형제들 중 데니스는 아버지에게 가장 자주 매를 맞고 심한 학대를 받았다. 1976년 그는 "우리는 엿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 아버지는 폭군이었다. 그는 우리를 때리고 육체적으로 짓밟았다. 우리처럼 그런 일을 겪은 아이들은 모른다."라고 말했다.
넘치는 활력과 싸움을 좋아하는 데니스는 가족의 노래 부르기 모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브라이언이 휴대용 녹음기로 만든 초기 녹음에서도 목소리를 내는 것을 피했다. 데니스는 나중에 브라이언을 "괴짜"라고 묘사하며 "야구를 하는 것보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레코드를 들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 나는 그것에 참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옆집 소녀와 의사 놀이를 하거나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데니스는 형들과 함께 늦은 밤, 그들이 함께 사용하는 침실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브라이언은 나중에 "우리가 부르던 특별한 노래"라고 회상하며 "아이보리 타워에서 내려와"라고 제목을 붙였다. 브라이언은 늦은 밤 형제들의 3부 하모니에 대해 "우리는 비치 보이스 활동을 시작할 때 우리를 도왔던 작은 조화를 이루었다."라고 말했다.
데니스는 자신에 대해 "만약 아버지가 아홉 살 때 비비탄 총을 주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 총으로 나는 내 분노를 풀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사냥, 낚시, 레이싱이 나의 관심사였다."라고 말했다. 브라이언은 1966년 ''멜로디 메이커''에 "데니스는 항상 움직여야 했다. 그를 1초라도 가만히 앉혀두고 싶으면, 그는 소리 지르고, 비명을 지르고, 흥분하고 발광한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엉망진창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14살 무렵, 데니스는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부기우기 스타일을 배웠다. 그는 나머지 가족과 함께 교회에 참석했던 것을 기억하며 "거기에 멋진 여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이 배구를 하러 가는 금요일 밤에 교회 피아노로 부기우기를 연주하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2. 2. 비치 보이스 결성 (1961-1960년대 중반)
1961년 록 음악 밴드 "비치 보이스(Beach Boys)"의 드러머로 가수 첫 데뷔하였다.[2] 윌슨가의 어머니 오드리(Audree)는 브라이언(Brian)에게 비치 보이스의 초기 멤버에 데니스를 포함시키도록 강요했다.[2] 1960년, 데니스는 호손 고등학교에서 드럼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나중에 선생님인 프레드 모건(Fred Morgan)은 데니스가 "드러머가 아닌 비터(beater)"였고 "배우고 싶을 때는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라고 말했다.[2] 브라이언에 따르면, "우리는 데니스의 바람으로 일종의 그룹으로 발전했다. 그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내가 조회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음악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데니스는 첫 그룹 리허설을 회상하며, 처음에는 "베이스를 칠 예정이었는데, 드럼을 치기로 결정했다. ... 드럼이 더 흥미로워 보였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베이스를 칠 수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브라이언은 결국 베이스를 연주하게 되었다. 데니스는 그들의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 "Surfin' Safari"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보컬을 불렀다.[2]비치 보이스는 1961년 말에 공식적으로 결성되었고, 머리(Murry)가 매니저를 맡았으며, 데뷔 음반 "서핀"으로 지역 히트를 기록했는데, 이 곡은 브라이언이 데니스의 권유로 쓴 곡이다.[2] 데니스는 "우리는 너무 흥분했다... 나는 거리에 뛰쳐나가 '들어봐, 우리 노래가 라디오에 나와!'라고 소리쳤다. 정말 멋있었다. 라디오에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비치 보이스는 캘리포니아 서핑 문화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발전시켰지만, 데니스는 밴드에서 유일한 실제 서퍼였다.[2] 칼(Carl)은 "데니스는 실제로 서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 모두, 심지어 브라이언도 시도했지만 엉망이었다. 우리는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1963년 초, 데니스는 브라이언의 협력자인 게리 어셔와 팀을 이루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포 스피드(Four Speeds)라고 부르며 싱글 "RPM"을 "My Stingray"와 함께 발매했다.[2] 1964년 3월, 데니스는 윌슨 가족의 집에서 나와 할리우드의 한 주소로 이사했다.[2] 밴드의 1964년 7월 앨범 ''올 섬머 롱''의 슬리브 노트에서 데니스는 "그들은 내가 빠른 삶을 산다고 말한다. 어쩌면 나는 단지 빠른 삶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세상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기억은 남을 것이다."라고 썼다.[2] 같은 해 12월, 머리는 한 기자에게 데니스가 돈을 "조금 너무 관대하게" 썼고 "얼마나 낭비했는지 알고 울었다. ... 다른 소년들은 돈을 투자하거나 저축했지만, 데니스는 94000USD를 썼다. 그는 집에 25000USD를 썼지만 나머지는 그냥 사라졌다. 데니스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계산서를 낸다."라고 말했다.[2]
1965년 1월, 브라이언은 밴드 동료들에게 당분간 더 이상 그룹과 함께 투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중에 데니스가 이 소식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즉각적인 반응으로 "큰 재떨이를 집어 들고 몇몇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말하거나 머리를 그것으로 칠 것이다. 그는 약간 폭발했다."라고 말했다.[2] 데니스의 절친한 친구인 사진 작가 에드 로치(Ed Roach)는 브라이언이 데니스가 관객으로부터 받는 숭배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무대에서 멀어졌다고 말했다.[2] 브라이언은 데니스가 받은 관심이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여자들은 '데니스, 데니스'라고 외치며 우리를 지나쳐 그에게 달려갔다."[2] 데니스는 나중에 그의 형에 대해 "브라이언 윌슨이 비치 보이스다. 그는 밴드 그 자체다. 우리는 그의 메시지 전달자일 뿐이다. 그는 모든 것이다. 끝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했다.[2]
2. 3. 음악적 성장과 찰스 맨슨과의 관계 (1960년대 후반)
데니스는 1960년대 후반부터 비치 보이스를 위해 곡을 쓰기 시작했다.[20] 그의 협력자 그렉 제이콥슨은 "그는 피아노 연주를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브라이언에게 코드를 꽤 잘 이해할 때까지 그것들을 보여달라고 부탁하곤 했다."라고 회상했다.[20]윌슨이 처음으로 발매한 주요 작곡은 1968년 4월 "Friends" 싱글의 B면으로 발매된 "Little Bird"였다.[20] "Little Bird"와 "Be Still"은 시인 스티븐 칼리니치와 공동 작곡되었으며, 앨범 ''Friends'' (1968년 6월)에 수록되었다.[20] 그의 오리지널 곡인 "Be with Me"와 "All I Want to Do"는 데니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그룹의 다음 앨범 ''20/20'' (1969년 2월)에 포함되었다.[20] 데니스의 "Celebrate the News"는 독립 싱글 "Break Away"의 B면으로 발매되었다.[20]
이 무렵, 비치 보이스의 인기는 상당히 약화되었다. 데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기 성공을 이용하려는 몇몇 정신적인 공룡들의 태도 때문에, 브라이언의 엄청난 재능은 미국에서 완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그룹의 잠재력은 억압되었다. [...] 만약 비틀즈가 이런 종류의 오해를 겪었다면, 그들은 'Please, Please Me'와 'I Wanna Hold Your Hand'를 부르고 비틀 슈트를 입고 뛰어다니는 것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20]
1969년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데니스는 찰스 맨슨의 후견인이었다. 『20/20』에 수록된 "네버 런 낫 투 러브"는 맨슨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맨슨은 데니스에게 보복을 시사했다. 이 에피소드는 데니스의 남은 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4. 배우 활동과 솔로 활동 (1970년대)
1970년 솔로 가수로 데뷔하였고, 같은 해 유니버설 픽처스의 로드 무비 ''투-레인 블랙탑''에서 "정비공" 역을 맡아 촬영했다. 이 영화는 1955년형 쉐비를 타고 미국 전역을 목적 없이 운전하며 길거리 경주로 번 돈으로 살아가는 "운전자"(제임스 테일러)와 "정비공"(윌슨)의 이야기를 그린다. 1971년 7월 7일 뉴욕시에서 전 세계 최초로 개봉했다. 영화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컬트 클래식"으로 명성을 얻었다.데니스는 이후 비치 보이스의 앨범을 위해 계속해서 곡을 썼는데, 싱글 "Forever"를 수록한 ''Sunflower''(1970년 8월)가 대표적이다. 이 곡은 데니스의 가장 훌륭한 곡 중 하나로 여겨지며, "Slip On Through", "Got to Know the Woman", "It's About Time" 등 3곡이 더 수록되었다. "Slip On Through"는 비치 보이스가 A면 싱글로 발매한 데니스의 첫 번째 곡이었다.

1970년대 초, 윌슨은 비치 보이스 투어 연주자 Daryl Dragon과 함께 솔로 앨범 ''Freckles''를 위해 자료를 녹음했다. 데니스는 또한 앨범의 가제로 ''Poops''와 ''Hubba Hubba''를 제안했다.[15] 1970년 12월 4일, Stateside/EMI는 "Sound of Free"를 발매했는데, "Dennis Wilson & Rumbo"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영국에서만 발매된 싱글이다. B면에는 ''Sunflower''의 아웃테이크 "Lady"(일명 "Fallin' In Love")가 수록되었다. 1971년 비치 보이스 콘서트에서 데니스는 자신의 곡 "Barbara"와 "I've Got a Friend"를 피아노 솔로 연주로 선보였다. 전기 작가 Jon Stebbins는 "그는 자신의 시그니처가 될 파워 발라드 스타일을 개발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데니스가 비치 보이스의 1971년 8월 앨범 ''Surf's Up''에 기여한 두 곡 – "4th of July"와 "(Wouldn't It Be Nice to) Live Again" – 은 제외되었다. 당시 데니스는 다른 곡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서 직접 이 곡들을 뺐다고 말했다.[16] 밴드 매니저 Jack Rieley에 따르면, ''Surf's Up''에 데니스 곡이 없는 이유는 앨범 내 윌슨 형제 곡의 분담에 관한 갈등을 잠재우고, 데니스가 자신의 곡을 솔로 앨범을 위해 아껴두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 Stephen Desper는 데니스의 앨범에 대해 "90% 완성되었다"고 말했다. 밴드의 공동 매니저 Fred Vail은 이 앨범을 "절단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라고 묘사하며, "비치 보이스는 그의 곡들을 그룹의 결과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앨범의 여러 트랙 – "Baby Baby", "It's a New Day", "I've Got a Friend", "Behold the Night", "Hawaiian Dream", "Medley: All Of My Love / Ecology", "Before" – 은 2021년 박스 세트 ''Feel Flows''에 발매되었다.[17]
1971년 6월, 데니스는 손을 심하게 다쳐 한동안 드럼을 칠 수 없게 되었고, 1972년부터 1974년까지 Ricky Fataar가 그룹의 드러머를 맡았다. 전기 작가 David Leaf는 이 시기에 "데니스는 끊임없이 [밴드를] 그만두거나 해고당한 다음 다시 합류했다"고 썼다.
데니스의 앨범을 위해 의도되었던 "Make it Good"과 "Old Movie"(제목을 "Cuddle Up"으로 변경)는 비치 보이스의 1972년 앨범 ''Carl and the Passions – "So Tough"''에 수록되었다. 데니스는 다음 앨범 ''Holland''(1973)에서 "Steamboat"와 "Only with You" 두 곡을 쓰고 프로듀싱했다.
윌슨의 무대에서의 익살스러운 행동(예: 스트리킹)은 가끔 비치 보이스의 라이브 쇼를 방해했다. 그는 밴드의 브라더 스튜디오 시설에서 곧 나올 솔로 앨범을 계속 녹음했다. 1974년, 히트곡 모음집인 ''Endless Summer''가 성공하는 동안 데니스는 드럼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빌리 힌시에 따르면, 비치 보이스의 지원 밴드의 키보디스트는 데니스가 빌리 프레스턴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면서 "You Are So Beautiful"의 가사를 공동으로 쓰고 멜로디의 일부를 수정했던 해였다. 힌시는 "그날 밤 내가 거기 있었고, 데니스가 'You Are So Beautiful'을 쓰는 데 관여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으며, 그것이 우리가 콘서트에서 그 곡을 연주하는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1977년까지 데니스는 비치 보이스 내의 파벌들이 그에게 너무 스트레스를 주면서 그가 쓰고 녹음한 노래들을 축적했다. 그는 "만약 이 사람들이 우리가 만들어낸 아름답고 행복하며 정신적인 음악과 우리가 지지하는 모든 것을 돈 때문에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 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고 나는 그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라고 표현했다.[6] 그 후 그는 제임스 윌리엄 구에르시오에게 접근했는데, 그는 캐리부 레코드의 소유주였으며, 데니스를 두 앨범 계약에 서명하기 전에 "구조화된 녹음 과정"을 요구했다.[6]
데니스는 1977년에 데뷔 솔로 앨범 ''퍼시픽 오션 블루(Pacific Ocean Blue)''를 발매했다. 앨범은 적당히 팔렸고,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96위에 올랐지만, 이후 두 비치 보이스 앨범보다 높은 순위였다. 데니스 윌슨 솔로 투어가 계획되었지만, 음반 회사가 콘서트 지원을 철회하면서 취소되었다. 그는 1977년 비치 보이스 투어에서 가끔 솔로 곡을 연주했다.[18] 데니스는 앨범에 "내용이 없다"고 주장했지만,[19] ''퍼시픽 오션 블루''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컬트적 인기를 얻으며 약 25만 장이 팔렸다.[20][21]
이 앨범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사이에 대부분 절판되었다.[20] 2008년 6월에는 확장판 CD로 재발매되었다. ''롤링 스톤''과 ''모조'' 잡지에서 2008년 "올해의 재발매"로 선정되었고, 영국 LP 차트에서 16위, ''빌보드'' 카탈로그 차트와 빌보드 인터넷 판매 차트에서 8위를 기록했다.[22]
''퍼시픽 오션 블루''의 후속작 ''밤부(Bambu)''는 1978년 브라더 스튜디오에서 제작을 시작했으며, 당시 비치 보이스의 키보디스트이자 데니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리 무뇨스가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밤부''를 위해 공식적으로 녹음된 첫 네 곡은 무뇨스의 작곡으로, "It's Not Too Late", "Constant Companion", "All Alone", 그리고 "Under the Moonlight"였다. 이 프로젝트는 자금 부족,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으로 인한 데니스의 건강 악화, 경제적 문제와 결혼 문제, 비치 보이스의 동시 프로젝트 등으로 중단되었다. ''밤부''는 2008년 ''퍼시픽 오션 블루'' 재발매와 함께 공식적으로 발매되었다.
''밤부'' 세션의 두 곡인 "Love Surrounds Me"와 "Baby Blue"는 비치 보이스의 ''L.A. (라이트 앨범)''(1979)에 수록되었다.
2. 5. 밴드 내 갈등과 사망 (1980년대)
데니스는 알코올, 코카인, 헤로인을 남용했다.[36] 생애 마지막 해에 그는 거의 정상적인 목소리를 잃었고, 노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드럼 연주법을 잊어버려 비치 보이스 공연에 자주 불참했다.[24] 1977년 9월 3일, 공항 활주로에서 벌어진 대립 이후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비치 보이스를 떠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들은 마치 내가 솔로 앨범을 냈으니 구석으로 가서 비치 보이스를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어. 그들은 앨범 때문에 정말 괴로워해. 앨범이 그렇게 잘 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고, 인터뷰에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아."라고 말했다.[25] 2주 후, 분쟁이 해결되었고 데니스는 다시 그룹에 합류했다.[25]
1981년 1월, 당시 브라이언의 여자친구이자 간호사였던 캐롤린 윌리엄스는 데니스가 브라이언을 유혹하여 약 15000USD 상당의 코카인을 구입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브라이언의 보디가드 로키 팸플린과 윌슨가의 사촌 스탠 러브는 이 사건을 알고 데니스를 자택에서 폭행했다. 이 폭행으로 인해 그들은 약 1000USD의 벌금을 물었고, 데니스는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했다.[26]
비치 보이스가 브라이언에게 유진 랜드리의 24시간 치료 프로그램에 재입원할 것을 압박하자, 데니스는 친구들로부터 자신이 밴드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36] 1983년 9월 마지막 공연 이후,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은 그에게 알코올 문제로 재활 치료를 받거나 함께 라이브 공연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했고, 데니스의 불신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36] 당시 그는 노숙자였고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36] 그는 이틀 동안 애리조나의 한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았고, 1983년 12월 23일에는 산타모니카의 세인트 존스 병원에 입원하여 1983년 12월 25일 저녁까지 머물렀다. 산타모니카 베이 인에서 폭력적인 말다툼을 벌인 후, 데니스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병원에 입원했다. 몇 시간 후 그는 퇴원했고, 즉시 음주를 재개한 것으로 알려졌다.[36][27]
1983년 12월 28일, 데니스는 하루 종일 술을 마신 후 오후에 3년 전 이혼 당시 그의 요트에서 바다에 버려진 전 부인의 소지품을 찾기 위해 마리나 델 레이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익사했다.[36] 법의학 병리학자 마이클 헌터는 데니스가 사망 직전에 얕은 물에서 의식 상실을 겪었다고 믿었다.[28] 1984년 1월 4일, 데니스의 시신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미국 해안 경비대에 의해 수장되었다. 비치 보이스는 곧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데니스가 비치 보이스의 전통을 이어가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정신은 우리의 음악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30] 그의 노래 "Farewell My Friend"가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29]
데니스의 미망인 숀 러브는 데니스가 수장을 원했고, 그의 형제 칼과 브라이언은 데니스의 화장을 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30] 당시에는 해안 경비대와 해군 참전 용사만 먼저 화장하지 않고 미국 해역에서 수장될 수 있었지만, 데니스의 수장은 당시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개입으로 가능해졌다.[31] 2002년 브라이언은 데니스에게 전통적인 장례를 치러야 했다고 믿으며 이 방식에 불만을 표했다.[32]
3. 사생활
윌슨은 1965년 7월 29일에 캐롤 프리드먼과 결혼했지만 1967년에 이혼했다. 프리드먼과의 사이에서 딸 제니퍼를 낳았고, 그녀의 이전 관계에서 얻은 아들 스콧을 입양했다.[42] 두 번째 아내는 바바라 차렌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마이클과 칼을 두었다. 데니스의 노래 "Lady"와 "Barbara"는 차렌을 위해 쓰여졌다.[42] 이후 배우 카렌 램과 두 번 결혼했는데, 그녀는 시카고의 키보디스트 로버트 램의 전 부인이었다. 1976년과 1978년에 결혼했다.[42]
1978년, 애리조나에서 열린 비치 보이스 콘서트 후, 데니스는 호텔 방에서 16세 소녀와 마약과 술을 공유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데니스는 이 사건을 함정이라고 언급하며 100000USD의 법률 비용을 지불했다.[42]
1979년부터 1982년까지 데니스는 플리트우드 맥의 크리스틴 맥비와 교제했다. 플리트우드 맥의 1982년 노래 "Only Over You"는 맥비가 데니스에 대해 쓴 곡이다. 맥비는 나중에 데니스에 대해 "그의 절반은 어린아이 같았고, 나머지 절반은 미쳤다"라고 말했다. 믹 플리트우드는 그들을 서로 소개했는데, "크리스는 이미 갑상선 20개를 가진 남자 같았던 데니스, 게다가 엄청난 양의 코카인과 술을 들이붓는 그를 따라가느라 거의 미쳐버릴 뻔했다"라고 썼다.[42]
그가 사망했을 당시, 윌슨은 숀 마리 해리스(1964년 12월 30일 출생)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별거 중이었다. 숀 마리 해리스는 그의 사촌이자 밴드 동료인 마이크 러브의 딸이라고 주장했지만, 러브는 이 주장을 부인했다. 윌슨과 숀은 아들 게이지 데니스(1982년 9월 3일 출생)를 두었다.[42]
4. 음반 목록
'''싱글'''
날짜 | 제목 | 레이블 |
---|---|---|
1970년 12월 | "자유의 소리" / "레이디" | 스테이트사이드 |
1977년 9월 | "리버 송" / "안녕 내 친구" | 카리부 |
1977년 10월 | "유 앤 아이" / "금요일 밤" |
'''데니스 윌슨이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한 노래'''
- ''서퍼 걸'' (1963)
- * "사우스 베이 서퍼 (The Old Folks at Home)"
- ''셧 다운 볼륨 2'' (1964)
- * "데니의 드럼"
- ''프렌즈'' (1968)
- * "프렌즈"
- * "아침에 여기 있어"
- * "여자가 필요할 때"
- * "리틀 버드"
- * "가만히 있어"
- ''20/20'' (1969)
- * "내 곁에 있어줘"
- * "올 아이 원트 투 두"
- * "사랑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마세요"
- ''선플라워'' (1970)
- * "슬립 온 스루"
- * "여자를 알아야 해"
- * "이제 시간이야"
- * "영원히"
- ''칼 앤 더 패션스 – "소 터프"'' (1972)
- * "잘 만들어"
- * "껴안아요"
- ''홀랜드'' (1973)
- * "증기선"
- * "오직 당신과 함께"
- ''퍼시픽 오션 블루'' (1977)
- * "리버 송"
- * "무슨 문제야"
- * "문샤인"
- * "금요일 밤"
- * "몽상가"
- * "당신을 생각하며"
- * "시간"
- * "유 앤 아이"
- * "퍼시픽 오션 블루스"
- * "안녕 내 친구"
- * "무지개"
- * "쇼의 끝"
- ''퍼시픽 오션 블루'' CD 재발행 보너스 트랙
- * "사랑의 줄다리기"
- * "홀리 맨"
- * "멕시코"
- ''밤부 (더 카리부 세션스)'' (2017)
- * "스쿨 걸"
- * "사랑 기억해 줘"
- * "와일드 시추에이션"
- * "커먼"
- * "정말로 당신인가요"
- * "그는 부랑자야"
- * "칵테일"
- * "사랑해요"
- * "잠자리에 들 시간"
- * "앨범 태그 송"
- * "당신을 생각하며"의 피아노 변주곡
- ''L.A. (라이트 앨범)'' (1979)
- * "사랑은 나를 감싸네"
- * "베이비 블루"
- ''텐 이어스 오브 하모니'' (1981)
- * "샌 미겔"
- ''굿 바이브레이션스: 비치 보이스 30주년'' (1993)
- * "7월 4일"
- ''엔드리스 하모니 사운드트랙'' (1997)
- * "바바라"
- ''얼티밋 크리스마스'' (1998)
- * "모닝 크리스마스"
- ''더 스마일 세션스'' (2011)
- * "난 몰라"
- ''메이드 인 캘리포니아'' (2013)
- * "다시 살면 좋겠네"
- * "헛간 블루스"
- * "내 사랑은 살아있다"
- * "뉴스 축하해"
- * "자유의 소리"
- * "레이디"
- ''웨이크 더 월드: 더 프렌즈 세션스'' (2018)
- * "아웨이"
- * "제목 없음 1/25/68"
- ''아이 캔 히어 뮤직: 더 20/20 세션스'' (2018)
- * "음, 당신도 내가 알았다는 걸 알아요"
- * "사랑의 사건"
- * "복숭아"
- * "더 궝"
- * "꿈을 꾸는 시간" (또한 ''호손, CA'' (2003)에도 수록)
- * "모나 카나" (또한 ''메이드 인 캘리포니아'' (2013)에도 수록)
- ''1969: I'm Going Your Way'' (2019)
- * "I'm Going Your Way"
- ''필 플로우즈 (음반)'' (2021)
- * "아기야 아기야"
- * "새날이야"
- * "메들리: 나의 모든 사랑/생태학"
- * "전에"
- * "밤을 보라"
- * "하와이안 드림"
- * "내 친구가 있어"
- ''세일 온 세일러 – 1972'' (2022)
- * "나를 데려가 줘"
- '''''1972년 발매''''' (2022)
- * "미지의 피아노/신스 트랙"
5. 출연 영화
Dennis Wilson영어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 1970년 유니버설 픽처스의 로드 무비 ''투-레인 블랙탑''에서 "정비공" 역으로 출연했다.[40][41] 이 영화는 1955년형 쉐비를 타고 미국 전역을 목적 없이 운전하며 길거리 경주로 번 돈으로 살아가는 "운전자"(제임스 테일러)와 "정비공"(윌슨)의 이야기를 다룬다. 1971년 뉴욕시에서 전 세계 최초로 개봉했으며, 엇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컬트 클래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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